폼페이의 개에게는 목걸이와 사슬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서기 79년 화산이 분화했을 때 이 개가 달아나지 못한 이유도 그 사슬에 있었다고 폼페이 고고학공원은 설명합니다.
오늘날 알려진 개의 모습은 몸이 남긴 빈 공간에 석고를 부어 만든 석고상입니다. 개가 재난을 겪은 때와 사람들이 그 흔적을 찾아 형태를 떠낸 때 사이에는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목걸이와 사슬이 남은 집
개의 석고상은 폼페이의 베소니우스 프리무스의 집을 발굴할 때 만들었습니다. ‘베소니우스 프리무스’는 이 개가 발견된 집에 붙은 이름입니다.
목걸이로 사슬에 묶여 있던 상태는 폼페이 고고학공원의 개 석고상 설명에 나옵니다. 사슬이 탈출을 막았다는 설명도 당시의 목격담이 아닌 이 유물에 대한 후대의 해설입니다.

이 해설에는 사슬의 고정 위치나 개가 움직인 순서까지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몸의 형태만으로 마지막 동작을 그대로 복원하거나 정확한 사망 원인을 밝혀내기도 어렵습니다.
몸이 사라진 자리에 석고를 붓다
어떻게 몸이 사라진 뒤에도 개의 형태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굳은 화산재 속에서 몸이 분해되면 그 자리에 빈 공간이 남습니다. 주변의 단단한 재가 틀처럼 몸의 윤곽을 간직한 셈입니다.

그 빈 공간에 석고와 물을 섞어 붓고 굳힌 뒤 주변을 걷어 내면, 고대에 남은 몸의 윤곽을 따라 후대의 석고가 굳은 모습이 드러납니다. 이 석고상은 몸이 돌로 변해 남은 화석과는 다르며, 고대인이 깎아 만든 조각도 아닙니다.

석고상 안에 분해되지 않은 뼈나 금속 물건이 있으면 나중에 부은 석고와 함께 남을 수 있습니다. 몸을 떠낸 석고와 안에 남은 뼈·물건은 이처럼 생긴 시기가 다릅니다.
폼페이 고고학공원의 석고상 해설은 이런 제작법과 잔존물을 설명합니다. 이 개의 석고상 내부를 검사해 무엇이 얼마나 남았는지 밝힌 자료는 아닙니다.

서기 79년은 개가 재난을 겪은 해이고, 이 개의 석고상을 만든 때는 19세기입니다. 피오렐리가 발전시킨 방법으로 사람의 석고상을 만들기 시작한 해는 1863년입니다. 이 연도가 개 석고상의 정확한 제작 연도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개 조심’ 그림은 다른 집에 있습니다
폼페이에는 개의 석고상과 함께 널리 알려진 개 그림도 있습니다. 작은 조각들을 맞춰 완성한 모자이크입니다. 그림에 적힌 ‘CAVE CANEM’이라는 문구는 ‘개 조심’을 뜻합니다.

이 모자이크가 놓인 곳은 비극 시인의 집 주출입구입니다. 비극 시인의 집 안내에 나오는 개 그림과 베소니우스 프리무스의 집에서 나온 개 석고상은 각각 다른 집의 흔적입니다.
모자이크는 개를 그린 그림이고 석고상은 실제 몸이 남긴 빈 공간에서 얻은 형태입니다. 서로 다른 집에서 다른 방식으로 만든 두 유물을 같은 개의 생전 초상과 죽은 뒤 모습으로 연결할 근거는 없습니다. 이 두 유물만으로 로마인 전체가 개를 어떻게 길렀는지 판단하기도 어렵습니다.

집을 지키던 개에게 남은 것
이 개의 이름이나 생전의 구체적인 행동과 성격, 마지막 순간의 마음은 확인된 기관 해설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이름을 모른다고 해서 처음부터 이름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으며, 석고상의 외형만으로 오늘날의 특정 견종을 정할 근거도 부족합니다.
사람과 함께 살던 개의 기록이 후대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과정은 하치코는 무엇을 기다렸나: 실제 기록과 충견의 탄생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름 대신 전해지는 것은 이 개가 맡았던 일입니다. 목걸이를 차고 사슬에 묶여 지냈던 이 개를 폼페이 고고학공원의 보스코레알레 안내서는 집을 지키는 개로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