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접시 안에 몸이 길고 다리가 짧은 개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 아래에는 개의 이름과 화가의 서명이 보입니다. 파블로 피카소가 닥스훈트 럼프(Lump)에게 그려 준 접시입니다.
럼프는 사진가 데이비드 더글러스 덩컨의 개였습니다. 피카소를 찾아갔던 작은 개가 어떻게 접시의 주인공이 되었을까요? 실제 접시와 덩컨이 남긴 사진을 따라가면 그날의 식탁과 이후의 생활이 조금씩 보입니다.
점심 식탁에서 시작된 개의 접시
1957년 4월 19일, 프랑스 칸의 라 칼리포르니 저택에서 피카소는 식사용 접시에 럼프를 그렸습니다. 지름은 24cm입니다. 특별히 주문한 작품용 바탕이 아니라 시중에서 판매하던 식기였습니다.
해리 랜섬 센터가 소개한 덩컨의 회고에 따르면, 점심을 먹던 피카소는 럼프에게 자기 접시가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덩컨이 없었다고 답하자 피카소는 앞에 놓인 접시를 집어 들고 식탁의 붓과 물감으로 개를 그렸습니다. 럼프에게 바치는 글과 서명, 날짜를 적은 뒤 접시를 덩컨에게 건넸습니다.
피카소의 손에서 개를 위한 선물이 된 접시입니다. 다만 럼프가 이후 이 접시에 먹이를 담아 먹었는지는 이 자료만으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소장기관은 럼프에게 헌정한 기념 접시로 소개합니다.
찾아온 개가 함께 사는 개가 되었습니다
럼프의 방문은 하루의 만남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국립미술사연구소(INHA)는 덩컨의 사진집을 소개하면서 럼프가 피카소와 1963년까지 6년을 함께 지냈다고 설명합니다. 접시를 그린 1957년부터 이어진 생활입니다.
사진집에 담긴 피카소와 럼프의 모습은 화가의 개인적인 시간을 가까이서 보여 줍니다. 작품을 만들던 사람도 집에서는 식사를 하고 동물과 시간을 보냅니다. 럼프가 있는 장면을 보면 이름만 익숙했던 피카소의 생활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떠올리게 됩니다.
이 일화가 모든 닥스훈트의 성격을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덩컨과 피카소가 만난 럼프라는 한 마리의 이야기입니다. 닥스훈트의 크기와 털 유형이 궁금하다면 멍클라우드의 닥스훈트 종류 비교 글에서 따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진가가 남긴 예술가의 생활
덩컨은 피카소의 사진을 찍기 전부터 전쟁 현장을 기록하던 사진가였습니다. 해리 랜섬 센터의 소장 자료 안내에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취재 기록이 함께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가 찍은 피카소의 사진에는 작업하는 모습뿐 아니라 가족과 식탁에서 이야기하거나 혼자 시간을 보내는 장면도 들어 있습니다.
럼프도 이런 생활 기록 안에 남았습니다. 덩컨은 사진과 짧은 글을 엮어 2006년 사진집 Picasso & Lump: A Dachshund’s Odyssey를 냈습니다. INHA는 이 책의 흑백 사진을 소개하며 피카소와 럼프가 함께한 사적인 순간에 주목합니다.
작은 개를 다룬 이야기라고 해서 사진의 의미까지 작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개가 누구와 지냈는지, 어떤 장소에 있었는지, 사람이 무엇을 하던 중이었는지를 함께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품만 볼 때와는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그림을 그리던 사람 곁에는 누가 있었을까요?
접시 밖의 그림에도 들어간 럼프
럼프는 접시 한 장에만 남은 개가 아닙니다.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은 피카소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Las Meninas)을 다시 그린 작품에서 원작의 큰 마스티프를 럼프로 바꾸었다고 설명합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에는 궁정 인물들과 함께 개가 등장합니다. 피카소는 그 구성을 새롭게 그리면서 자신의 생활에 들어온 닥스훈트를 넣었습니다. 미술관이 나란히 제시한 두 작품의 개 부분을 보면 차이가 더 분명합니다. 큰 개가 있던 자리에 몸이 길고 낮은 개가 보입니다.
유명한 옛 그림을 다시 그리는 작업에 함께 살던 개가 등장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럼프가 피카소의 일상과 작품 양쪽에 남았다는 것을 접시와 회화에서 각각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럼프가 작품의 구상 전체를 이끌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한 집의 선물이 소장 자료로 남기까지
해리 랜섬 센터는 2011년 덩컨이 접시를 기증했다고 발표했습니다. 프랑스의 한 식탁에서 만들어진 선물이 미국 텍사스대학교 오스틴의 소장품이 된 것입니다. 소장 기록과 사진을 함께 확인할 수 있어 막연한 전설로만 전해지는 일화와는 다릅니다.
덩컨의 자료에는 사진 인화본과 필름뿐 아니라 사진집을 만들 때 쓴 글, 편집 자료, 편지와 장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장 목록을 보면 사진이 찍힌 뒤 책으로 만들어지는 과정까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럼프의 이야기도 개와 화가의 만남에 사진가의 기록이 더해져 전해졌습니다.
이 접시를 세계에서 가장 비싼 개 밥그릇이라고 부를 근거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2011년 발표문의 경매 가격은 다른 피카소 접시의 비교 사례이며 이 접시의 거래 가격이 아닙니다. 가격을 붙이지 않아도 접시에는 개의 이름, 피카소의 그림, 그날의 날짜가 남아 있습니다. 럼프라는 작은 개에게 건넨 선물이 지금까지 전해진 이유를 그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참고 자료
- 해리 랜섬 센터의 2011년 접시 기증 발표 — 제작일·장소·지름, 덩컨의 회고와 기증을 확인했습니다. 당시 전시 안내를 현재의 전시 일정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 해리 랜섬 센터의 럼프 접시와 덩컨 사진 — 접시의 실제 모습과 그림을 그리거나 접시를 보여 주는 순간의 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 프랑스 국립미술사연구소의 『Picasso & Lump』 소개 — 사진집의 구성과 발행 연도, 럼프가 피카소와 함께 지낸 기간을 확인했습니다.
-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의 『시녀들』 해설 — 원작의 마스티프와 피카소 그림의 럼프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 해리 랜섬 센터의 덩컨 소장 자료 목록 — 전쟁 취재와 피카소의 생활 사진, 사진집 제작 자료의 보존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본문의 삽화 5장은 실제 참고 사진을 확인한 뒤 AI로 제작했습니다. 역사 사진·원작 사진과 구분해 보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