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터비 제1차 세계대전 동행기, 훈련장에서 전후의 삶까지

1917년 훈련장에서 병사들을 만난 스터비는 프랑스 참호와 전후 대학 생활까지 콘로이와 함께했습니다. 경고와 부상, 외투와 사진에 남은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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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개들

13 편 중 7 번째 이야기

사람과 함께 일하고 살아온 개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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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읽기 순서 · 13편
  1. 발토 한 마리의 영웅담이 아니었다: 토고와 1925년 놈 혈청 운송
  2. 하치코는 무엇을 기다렸나: 실제 기록과 충견의 탄생
  3. 사람의 한 끼를 위해 바퀴 속을 달렸던 개, 턴스핏 도그
  4. 철도와 함께 달라진 로트와일러의 일, 가축시장부터 경찰견까지
  5. 소방서 달마시안 역사, 왜 말과 마차 곁을 달렸을까요?
  6. 세인트 버나드 술통은 진짜였을까? 200년 넘게 이어진 전설
  7. 스터비 제1차 세계대전 동행기, 훈련장에서 전후의 삶까지 읽는 중
  8. 괌 전투 군견, 정글에서 개의 신호를 읽은 사람들
  9. 남극에 남겨진 타로와 지로, 살아남은 형제의 엇갈린 삶
  10. 대통령의 반려견 팔라는 왜 정치 연설에 등장했을까?
  11. 닥스훈트는 어떻게 전쟁 포스터에서 ‘적국의 개’가 됐을까?
  12. 표 없이 기차에 오르던 개, 철도견 밥을 아시나요?
  13. 폼페이의 개는 왜 도망칠 수 없었을까?
이 글의 적용 대상과 조건

역사 속 반려견과 사람의 관계를 과장 없는 기록과 함께 읽고 싶은 독자

1917년,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의 예일대 인근에는 프랑스로 떠날 병사들이 모여 훈련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짧은 꼬리를 가진 작은 떠돌이개가 나타났습니다. 병사들은 개를 스터비(Stubby)라고 불렀습니다. 영어로 짧고 뭉툭하다는 뜻을 담은 이름입니다. 그중 로버트 콘로이라는 병사와 특히 가까워진 스터비는 제102보병연대의 마스코트가 됐습니다.

콘로이가 밥을 먹으면 곁에서 먹고, 행군하면 따라 걷던 개는 바다까지 건넜습니다. 프랑스의 참호에서 병사들과 지냈고, 다쳐 치료를 받았으며,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대학 미식축구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스터비의 생애는 전쟁터에서의 활약과 그 뒤에도 이어진 동행을 함께 볼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17년 훈련장 가장자리에서 병사와 마주한 작은 브린들색 테리어형 개를 그린 재구성 일러스트
예일대 인근 훈련장에서 시작된 만남을 바탕으로 만든 재구성 일러스트입니다. 실제 현장 사진은 아닙니다.

훈련장에서 배운 행군과 경례

미국은 1917년 4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습니다. 유럽에서는 이미 몇 해째 전쟁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미국에서 막 모인 병사들에게는 군대 생활부터 익히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스터비가 찾아온 곳도 그런 훈련장이었습니다. 제102보병연대는 제26사단, 이른바 ‘양키 사단’에 속했습니다.

스미스소니언이 전하는 스터비의 모습은 병사들의 일과를 따라 배우는 개에 가깝습니다. 나팔 소리와 대열의 움직임에 익숙해지고, 콘로이에게 앞발을 얼굴 옆으로 드는 경례 동작도 배웠습니다. 병사들과 함께 지내며 부대의 분위기를 밝게 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당시 스터비는 군이 특정 임무를 위해 선발하고 훈련한 정규 군견으로 입대한 개는 아니었습니다.

부대가 프랑스로 이동할 때 콘로이는 스터비를 수송선 S.S. Minnesota에 몰래 태웠습니다. 스미스소니언 해설에는 출항 뒤까지 석탄 저장 공간에 숨겨 두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프랑스에서 지휘관에게 들켰을 때 스터비가 경례를 해 함께 머물도록 허락받았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정확한 대화까지 남아 있지는 않지만, 병사들이 좋아하던 개가 전선으로 가는 부대의 일원이 되어 간 과정을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기 항구에서 수송선을 바라보는 병사와 작은 개를 그린 재구성 일러스트
프랑스로 향한 항해를 표현한 재구성 일러스트입니다. 실제 수송선의 외형이나 승선 장면을 복원한 그림은 아닙니다.

참호의 소리와 냄새 속에서

제102보병연대가 프랑스 전선에 들어간 것은 1918년 2월이었습니다. 병사들은 땅을 파 만든 참호에서 생활하며 적의 공격에 대비했습니다. 총성과 포격뿐 아니라 독가스도 큰 위협이었습니다. 스터비 역시 그 환경에 노출됐고, 가스 피해를 입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코네티컷주 군사부의 역사 해설은 스터비가 가스 공격을 일찍 알아차려 병사들에게 알리고, 잠든 보초를 깨워 독일군의 접근을 경고했다고 전합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경고 일화입니다. 스터비가 병사들 사이를 오가며 사기를 북돋웠다는 설명도 함께 나옵니다. 사람들이 잠시 긴장을 풀고 익숙한 일상을 느끼게 하는 것 역시 전선에서 개가 맡았던 역할이었습니다.

독일군 병사를 붙잡는 데 도움을 줬다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스미스소니언은 스터비가 연합군 참호 근처의 독일군 병사에게 짖고 달려들었고, 그 소리를 들은 미군 병사들이 도착했다고 설명합니다. 흔히 ‘독일군 첩자를 생포했다’고 소개되지만, 그 병사가 정찰 중이었는지, 길을 잃었는지, 다른 이유로 그곳에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독일군 병사의 체포를 도왔다는 이야기로 읽는 편이 정확합니다.

이런 일화들은 박물관과 군사기관의 해설에 남아 있습니다. 다만 정확히 몇 명을 구했는지, 얼마의 거리에서 가스를 감지했는지까지 알려 주는 자료는 아닙니다. 스터비의 행동을 전하되 새로운 성능 수치나 구조 인원을 붙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세슈프레에서 다친 스터비

1918년 4월, 스터비가 속한 제102보병연대는 프랑스 세슈프레 일대에 있었습니다. 4월 20일 독일군이 이 지역을 공격했고, 미군 병사들은 참호와 마을 곳곳에서 싸웠습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남은 전투 자료는 당시 포격과 혼전이 얼마나 거셌는지 보여 줍니다.

스터비도 이 무렵 폭발 파편에 다쳐 전선에서 물러나 치료를 받았습니다. 기관별 설명에는 상처 부위의 차이가 있지만, 부상과 회복을 거쳐 다시 부대와 함께했다는 큰 흐름은 같습니다. 회복하는 동안 부상병들 곁을 오갔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병사들에게 힘이 됐던 개 자신도 다른 이들의 보호와 치료가 필요했습니다.

스터비의 전쟁을 경고와 포획 장면만으로 채우면 이 시간이 빠집니다. 전선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위험을 함께 겪고, 다쳤을 때 돌보고, 회복 뒤 다시 만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전선의 참호에서 병사의 손 가까이에 앉은 작은 개를 그린 재구성 일러스트
참호에서의 생활을 표현한 재구성 일러스트입니다. 특정 전투나 가스 경고 순간을 그린 기록화는 아닙니다.

작은 외투에는 무엇이 달려 있을까?

스터비의 사진을 보면 몸을 덮은 작은 외투에 여러 장식이 빼곡하게 달려 있습니다. 이 외투는 지금도 스미스소니언 소장품으로 남아 있습니다. 박물관은 1918년 프랑스 샤토티에리의 여성들이 스터비를 위해 만든 가죽 외투라고 설명합니다. 가운데에는 연합국의 국기를 둥글게 수놓은 장식이 있습니다.

외투의 부착물 목록을 읽으면 스터비가 지나온 장소와 만난 사람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26사단 패치, 복무·부상 표식, 전투와 지역을 기념하는 물건, 미국 재향군인회인 아메리칸 리전의 행사 배지 등이 섞여 있습니다. 프랑스 전선의 기억에 미국으로 돌아온 뒤의 행사 기록까지 더해진 셈입니다. 외투에 달린 장식 모두를 스터비가 받은 정식 무공훈장으로 세면 안 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1921년에는 존 퍼싱 장군이 스터비에게 금메달을 달아 주었습니다. 퍼싱은 전쟁 중 미국 원정군을 지휘한 인물입니다. 이 메달은 Humane Education Society가 마련한 민간 표창이었습니다. 장군이 직접 달아 주었다는 사실과 미군의 공식 무공훈장이라는 주장은 구분해야 합니다. 의회도서관에 남은 퍼싱·스터비·콘로이의 사진에서는 전후에도 이어진 관심을 직접 볼 수 있습니다.

박물관 진열대의 작은 외투와 여러 부착물을 가까이 보여 주는 상징 일러스트
여러 기억이 모인 외투를 표현한 상징 일러스트입니다. 실제 유물의 장식과 문양은 아래 스미스소니언 소장품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전트 스터비’라는 이름과 알려지지 않은 혈통

스터비는 오늘날 ‘서전트 스터비’, 곧 병장 스터비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독일군 병사를 붙잡은 공으로 진급했다는 설명도 자주 따라붙습니다. 그러나 연구자 앤 바우섬은 스터비 생전의 신문 기사 수백 건을 살피면서도 병장이라는 호칭을 찾지 못했다고 밝혔습니다. 정식 진급을 뒷받침할 동시대 인사명령도 이 글에서 확인한 자료에는 없습니다. 익숙한 별칭은 쓸 수 있지만, 공식 계급이 확정된 것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견종도 한 가지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스미스소니언 큐레이터는 특정한 순종으로 볼 수 없다고 설명하고, 조지타운대 기록은 당시 보스턴 불테리어와 대체로 닮았다고 적었습니다. 사진에서 확인되는 것은 짧은 꼬리, 흰 무늬, 줄무늬가 섞인 브린들색 털을 지닌 작은 테리어형 개의 모습입니다. 혈통 기록이 없는 만큼 현대의 보스턴 테리어나 핏불 중 하나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작은 개의 스케치와 비어 있는 혈통 기록 카드를 놓은 책상을 그린 상징 일러스트
스터비의 외모와 알려지지 않은 혈통을 표현한 상징 일러스트입니다. 실제 혈통 문서는 아닙니다.

참호에서 돌아와 미식축구장으로

귀국한 스터비는 유명해졌습니다. 재향군인 행사와 퍼레이드에 참여했고, 대통령들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전쟁을 겪고 돌아온 병사들에게 스터비는 함께했던 부대와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였습니다. 여러 행사에서 찍힌 사진은 작은 개를 향한 관심이 전쟁 뒤에도 이어졌음을 보여 줍니다.

조지타운대 도서관은 1922년 법학을 공부하러 온 콘로이와 함께 스터비도 대학에 왔다고 기록합니다. 스터비는 미식축구팀 호야스의 마스코트가 됐습니다. 경기 전반과 후반 사이에는 코로 공을 밀며 운동장을 돌아다녔고, 관중들은 그 모습을 즐겼습니다. 훈련장에서 병사들의 행군을 따라다니던 개가 이번에는 학생들과 관중의 눈길을 끈 것입니다.

스터비는 1926년 3월 16일 워싱턴에서 죽었습니다. 여러 신문이 부고를 실었고 조지타운대 학생 신문도 스터비를 추모했습니다. 흔히 사망일과 혼동되는 4월 4일은 뉴욕타임스에 부고가 실린 날짜입니다.

콘로이는 스터비의 몸을 표본으로 보존했습니다. 한동안 적십자 박물관에 전시됐던 표본은 1956년 5월 22일 스미스소니언에 기증됐습니다. 스터비가 죽은 지 30년 뒤였습니다. 오늘날 남아 있는 표본과 외투, 사진은 콘로이가 전쟁 뒤에도 오래 간직했던 동행의 흔적입니다.

1920년대 미국 대학가를 떠올리게 하는 길에서 남성과 작은 개가 함께 걷는 뒷모습을 그린 상징 일러스트
콘로이와 스터비의 전후 대학 생활을 표현한 재구성 일러스트입니다. 실제 조지타운대 캠퍼스 사진은 아닙니다.

스터비와 콘로이가 함께한 시간은 훈련장, 수송선, 참호, 병원, 대학으로 이어집니다. 각 장소에서 개가 한 일은 달랐지만 곁에 있던 사람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스터비를 오래 기억하게 하는 것도 이 구체적인 동행입니다. 병사들에게 가까이 다가온 개 한 마리가 전쟁을 지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고, 그 곁의 사람이 오랫동안 그 흔적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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